[2018년,스페인,맑음] #10. 어색했던 것이 당연해지는 순간_여유 편

글 입력 2019.05.10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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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月 맑지만 쌀쌀한 날



어느덧 낯선 땅, 말라가에 온 지 4개월째에 접어든다. 예전에는 낯설기만 하던 풍경과 사람들이 서서히 익숙해지고 반가워졌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크림색 천장이라던가. 맞은편 건물 창문에 비쳐 보이는 관람차의 모습. 눈을 뜰 수 없는 강렬한 햇살이나 가끔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으면 Hola, Qué tal?(스페인의 인사말)하는 하우스 메이트들의 인사라던가. 친구들을 만나면 왼쪽 한번, 오른쪽 한번 나누는 도스 베소스. 사소하지만 새롭게 내 삶을 채우게 된 것들이 이제는 없으면 서운할 정도로 당연해져 버렸다.


이제는 이곳에서 보낼 시간이 그동안 지낸 시간보다 짧아졌다. 그동안 밀려온 파도에 모래가 점점 젖어가듯, 나도 모르는 사이 말라가에서의 삶에 천천히 녹아들어 갔다.




#여유



한국에서 그토록 갈망했던 것이 바로 여유였다. 한국에 있을 땐, 여유를 즐기지 못하는 이유가 외부에 있다고 생각했다. 경쟁적인 분위기나 엄격한 교육 환경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모두 부재한 말라가에 오고 나니 정작 문제는 내부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처음으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순간이 찾아왔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여유로움이 아닌 불안감이었다. "내가 이렇게 쉬어도 되는 건가?"라는 물음이 떠오르자 갖은 걱정과 불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외적 휴식 상태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내부에선 이렇게 시끄러우니 제대로 된 여유를 누릴 수 없었다. 그러나 비단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에 온 한국 교환학생들끼리 이야기를 하다 이 주제를 꺼내니 다들 비슷한 반응이었다.


우리는 왜 쉴 수 있는 환경이 주어져도 불안한가. 고민해보니 그동안 우리 모두 '쉬는 것은 뒤쳐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한 사회에서 살다 왔음을 깨달았다. 뒤쳐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쉬는 것도 알차게 쉬려 했다. 혹은 자신의 '쉼'은 점심까지 늘어지게 늦잠을 자는 게으른 사람의 '쉼'과는 다름을 끊임없이 증명하려고 들었다. 그러다 보니 몸과 마음이 편안한 진정한 휴식을 취해본 경험이 많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진정한 여유를 즐길 수 있을까. 여유롭기로 세상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들이 바로 말라가 사람들이니 그들의 삶에 답이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매일매일 거리에서 사람들만 관찰하고 있을 순 없는 일이라 그다지 큰 일을 하진 않았다. 그냥 그들과 뒤섞여 함께 삶을 살아 보았다.


토종 스페인인인 내 버디와 스페인에서 7년째 살고 있는 이탈리아인 하우스메이트 사이에는 은근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나에게 항상 "No pasa nada!"라고 말해주는 것이다.(직역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의역하자면 괜찮아!라는 표현이다.) 예를 들어, '나는 스페인어를 잘 못하는데 이번 수업에서 스페인어로 발표를 해야 해... 어떻게 하지?'같은 걱정을 그들에게 이야기를 할 때면 그 둘은 서로 항상 나에게 '괜찮아! 걱정하지 마!'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별 의미 없이 건넨 위로의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 말을 들을 때면 내가 안고 있던 태산 같던 걱정이 사실 별 것 아니라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지나고 보면 내가 하고 있던 수많은 걱정과 불안 중 대부분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거나 생각보다 사소한 것이었다. No pasa nada.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믿고 하나 둘 걱정을 내려놓기 시작하니 마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옛날 같으면 발을 동동 굴렀을 상황이 와도 스스로 No pasa nada를 외치며 마음을 다독일 수 있게 되었다. 또, 걱정되고 두려워서 시작도 못했던 때와 달리 뭐 좀 잘못되면 어떠냐 싶은 심정으로 새로운 것에 뛰어들 수 있는 배짱도 생겼다.

 

여유는 바깥에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서울은 삭막하고 칙칙한 회색 건물 투성이인 반면, 말라가는 파란 바다와 하늘이 있기에 여유로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서울에서 여유를 즐기지 못했던 사람이 말라가에 왔다고 해서 무조건 여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멀게만 느껴졌던 '여유'는 나 자신에게 걸어 두었던 속박, 걱정, 불안을 풀어 던지자 나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이영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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