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썰썰] 빠순이 청산기 EP3. 모든 순간이 사랑은 아니었음을

덕질 후에 남는 것들.
글 입력 2019.05.11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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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새해가 밝고 나라를 뒤흔든 사건이 터졌다. 유명 아이돌 승리의 클럽 ‘버닝썬’에서 일어난 폭행 사건이었다. 피해자 SNS가 화제 되며 수면 위로 드러난 이 사건은 수사하면 할수록 새로운 논란이 터졌다. 결국 사건의 배후엔 경찰이 있고 그들과 오랜 유착관계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이와 함께 승리가 있던 단톡방의 대화가 유출되면서 연예계 사건으로 크게 이슈 되었는데, 단톡방에 가수 정준영이 수차례 여성의 몰카를 유포한 것이 드러나 온 국민의 격분을 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가수 로이킴과 아이돌 밴드의 멤버 최종훈까지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 조사를 받는 등 사건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몇몇 남자 아이돌이나 배우가 연관되어 있다는 언론의 보도에 네티즌들이 이 사람이 맞다 아니다를 두고 설왕설래하기도 했을 만큼 가장 핫한 이슈였다.

버닝썬 사건은 연예계에 직격탄을 날렸다. 일단 피해 여성으로 근거 없는 소문이 나돌던 여자 연예인들은 황급히 소문을 부정하고 법적 대응을 경고했다. 가담했을 것이라 추측 받은 남자 연예인들도 사실을 부인하며 대처에 나섰다. 연예계는 몸을 사리는 분위기로 보였다. 정준영과 그 멤버들이 저지른 단톡방 몰카 범죄로 인해 이 사건은 더 이상 승리의 개인 사업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건에 연관되지 않으려 각자 단속을 철저히 한 가운데 연예계 팬들 사이에서도 격동의 파도가 일었다.

연예인, 특히 아이돌을 좋아하는 팬에게 이 사건은 초유의 사태였다. 내 주변만 해도 덕질을 그만둘까, 고민하는 아이돌 팬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에게 이 사건은 회의감 그 자체였다. 사건과 관계없는 아이돌을 좋아하던 내 지인은 "이번 팬질만 하고 그만둘거야. 정말 음악만 좋아해야지. 사람 속은 알 수가 없으니까."라며 몇차례 한탄했다. 꽤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는 평소 바른 이미지를 가진 연예인의 추한 실태를 보고,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믿는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은 듯싶다. 그러다 제가 알고 있는 자신의 최애에게도 감춰진 이면이 있진 않을까, 하는 의심이 피어나기 시작한 것 이다. 이 거센 현타(현실자각타임)는 덕후의 마음을 잠시 휴식기로 접어들게 하고, 아예 연예인을 다시는 좋아하지 않겠다 떠나게 했다.

주로 연예인의 실수나 잘못으로 큰 사건이 터지면 그 사건의 경중과 잘못을 따지는 여론이 있는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을 드는 '전지적 덕후시점'이 있다. 실제로 여러 연예계 사건이 터지면 그들의 팬 중 소수는 필사적으로 감싸고 돈다. 우리는 이것을 ‘피의 쉴드’라 부르고 그런 팬들을 비판한다. 얼마 전 마약 혐의로 물의를 빚은 가수 겸 배우 박유천의 사건 반응도 비슷했다. 일명 ‘변기 사건’이 터졌을 때, 그를 쉴드치던 한 팬은 유명한 발언을 남겼다. “눈을 봐라. 그럴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은 역대급 쉴드로 남아 아직도 유머로 소비된다.

前 아이돌 덕후 입장에서 그런 팬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최애의 허물과 잘못을 모두 감싸주고 싶은 욕구가 이성을 침식하면 생길 수 있는 일이다. 누군가는 이런 팬을 보며 사랑에 눈이 멀어 미쳤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최애의 잘못을 감싸는 저들의 마음이 곧 ‘사랑’은 아니다. 그러니까 순도 백프로의 고결한 사랑 따위는 아닐 거란 말이다.

그들이 이성이 마비된 것처럼 잘못한 연예인을 감싸고 도는 것은 어쩌면 저 자신을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사랑과 열정을 쏟아부었던 지난날이 더럽혀지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팬들도 자신의 덕질이 후회로 남기보다 아름다운 추억 정도로 기억되길 바란다. 그래서 그들에게 최애의 잘못은 ‘아니어야만 하는 일’이다.

사실 그들도 알고 있다. 연예인은 필연이 나이가 들고 인기가 떨어질 것이란 걸. 자신의 사랑이 영원할 거란 생각은 서서히 사그라들 것이고. 그렇다면 훗날 돌이켰을 때 제 덕질이 아름다운 기억이 되려면 최애가 멋진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래야 '아, 그래도 내가 헛되게 시간을 보낸 건 아니구나.' 싶을 테니까. 그렇게 누군가를 좋아했단 사실이 부끄러워지는 걸 두려워한 몇몇 팬들은 필사적으로 최애의 잘못을 덮는다. 때로는 집단으로 움직여 여론을 선동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아련한 추억과 멋진 최애는 팩트보다 중요한 일이다. “믿는다”고 소리치지만 사실 그들이 믿는 것은 완전무결한 최애와 그를 선택한 자신의 안목일 뿐이다. 과거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건이 거짓이라고, 모함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랑의 탈을 쓴 아집이다. 그 사실은 누구보다 덕후가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 덕질이 후회 없는 순간이 되는 건 팬의 컨트롤을 떠난 일이다. 연예인 본인의 행실에 달린 것일 뿐. 언제나 덕질 후엔 ‘미련’과 ‘추억’만이 남는다.





비교는 사람을 비이성적으로 만든다. 혼자서 할 땐 몰랐던 것들이 나보다 좋은 환경에서 더 나은 아웃풋을 내는 이와 비교하면 내 것이 한없이 모자라 보인다. 덕질도 마찬가지다. 수천 명의 팬들이 있는 SNS에서 나보다 더 열정적으로 보이는 팬을 발견하면 그리도 자존심이 상했다. 전혀 그럴 일이 아님에도.

한두차례 그런 감정을 겪자 나도 모르게 덕질 자체에 심취하게 되었다. 정말 최애를 사랑해서 한 덕질이라기 보다 ‘덕질을 하는 나’에게 취한 걸지도 모른다. 좀 더 많은 앨범을 사야 해. 남들보다 더 많이 공개방송을 가야지. 컴퓨터 모니터로는 성에 차지 않으니까 더 자주 눈에 담아야 해. 그리고 그 내용을 트위터에 올리면 순간 세계 최고의 팬이 된 것만 같았다. 내가 너를 가장 사랑한다고 최애의 귀까지 흘러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더 유별나고 부지런한 덕후가 되어야만 인정받는 것처럼 굴었다. 나라는 팬을 인터넷에 전시하는 것에 푹 빠져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 게 정말 사랑은 아니지 않나.

한바탕 열정이 휩쓸고 간 곳의 주위를 돌아보면 그제야 못 보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방치된 주변의 쓰레기와 찌꺼기들. 시야에 걸리적거린다고 죄다 치워버려 텅 빈 주변이 황량했다. 그러다 내가 버리지도 않았는데 사라진 것들에 대해 떠올려 본다. 찾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예전엔 꽤 소중했던 것 같은데. 문득 생각이 난 그 이름은 메신저 채팅방을 내리고 내려도 나오질 않는다. 뭐 하고 지내냐는 한 마디도 걸 수 없을 만큼 멀어진 사이가 무심했던 지난날을 증명한다. 잡히지 않는 먼 무대 위 별을 따라가느라 모든 감각을 잊었다. 그 황홀한 판타지에서 깨고 나니 내가 서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게 출발점에서 멀어져 있다. 나란히 바톤을 손에 쥐고 출발 신호를 기다리던 동료들은 어느새 반환점을 도는 중이다. 왜 내게 출발했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냐 따지기에는 이미 여러 차례 언질을 주었던 것이 어렴풋 기억난다. 더 멀어지기 전에 나도 부랴부랴 달리려는데 두어걸음 갔을까, 발목을 삐었다. 준비 운동을 제대로 하지 않은 탓이다. 하얀 수건을 던지고 절뚝이며 대기석으로 돌아갔더니 처음 보는 아이들 여럿이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다. 토익이 몇점이고 자격증이 몇 개며 학원에 다닌단다. 인턴, 대외활동…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단어들이 튀어나온다. 더 아득하고 캄캄한 기분에 잠겼다. 낯선 섬에 홀로 떨어진 것만 같다. 그러나 전에 있던 그 행복한 환상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단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게 줄곧 현실이었던 그곳이 사실은 환상이었다고 깨달은 순간 돌아갈 수 없다. 내 온 정신을 쏟아부은 내일 없는 덕질 후 남은 잔재는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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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그래서 덕질을 후회하나?’라고 묻는다면 대답을 망설인다. 후회하기도, 않기도 해서다.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모든 걸 해본 적이 있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다. 누구나 그렇게 살진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비록 미래를 위한 소득은 없었으나(사실 낭비에 가깝다) 미친듯이 파고든 무언가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소중하게 남은 내 덕질 친구들 때문이다. 비록 그들 중 가장 먼저 덕질에서 발을 뺐지만, 아직도 간간히 연락을 하고 지냄에 감사를 느낀다. 그들마저 없었다면 나의 빠순이 생활을 이렇게 글로써 이야기할 수도 없었을 거다. 낭비한 과거의 시간이 미치도록 아쉬워서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을 것 같다.

탈덕 후 남는 것은 구최애의 생일로 이룬 비밀번호뿐이라더니. 정말 그 흔적들은 내 삶 어딘가에 속속들이 박혀있다. 지나고 나면 덧없는 수많은 감정을 떠올린다. 왜 그땐 그리도 괴로워하며 에너지를 소모했을까. 지나고 나니 너무 별거 아니어서 조금 민망하다.

자, 이제 그때여서 할 수 있던 그때만의 일은 이 글을 끝으로 추억 깊은 곳에 묻어두려 한다. 모든 순간이 다 사랑은 아니었으나 사랑으로 시작한 일이었음은 분명했다. 부디 먼 훗날 돌이켰을 때 부끄러이 여기지 않을 수 있기를 바라며. 안녕, 20대의 빠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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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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