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무 것도 찾지 않는 방랑자의 여행기 [여행]

#1 D-10
글 입력 2019.05.14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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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찾지 않는 방랑자의 여행기 

#1 D-10


Opinion 민현




2018.12.31


작년의 마지막 날 드디어 결정했다, 조금 뜻밖이지만 원래 계획했던 대로. 이번 해에는 꼭 여행을 가야겠다. 아주 길게 가야지.



2019.1.15


어영부영 보름이 지났다. 뭐부터 해야하지? 고민하다 일단 돈부터 벌어야겠다하고 알바를 시작했다. 얼마 정도가 적당할까싶으면서도 사실 귀찮아서 이것저것 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일을 시작했다.



2019.3.13


비행기를 예약했다! 첫 목적지는 바르셀로나. 유럽에서 가장 가고싶었던 도시 바르셀로나 편 비행기를 예매하고 나니 벌써 여행이 시작된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스페인의 화려한 풍경이 내 눈 앞에 와 있는 것 같았다. 5월 23일까지 두달 가량 남았지만, 금방 그 시간이 지나갈 것 같았다. 여권부터 국제학생증, 유럽에서 교통수단, 숙박, 심지어 가져갈 가방까지 준비해야 할 게 너무 많아서 차근차근 준비하기로, 일단 여유롭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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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함브라 궁전
 


2019.3.30


생각의 여유는 그냥 계획 짜기를 싫어하는 내 성격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여행 계획을 짜는 건 피곤한 일이다. 여행은 가기 전 계획하는 여행, 가서 직접 겪는 여행, 다녀와서 하는 추억하는 여행을 합쳐 총 3번이라고 누군가는 말하지만 세 개의 여행 중 가장 가기 싫은 여행은 계획하는 여행이다. 계획하면서 앞으로 있을 여행을 기대하고 여행에서의 나를 상상하며 즐거워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텐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조금은 아쉬웠다. 어쩌면 나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2019.4.12


유럽에서 보게 될 수많은 관광지나 유적지 등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여행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김빠지는 글이겠지만 솔직하게 그런 건 내 관심을 크게 끌지는 않는다. 오히려 계획을 하면 할수록 기대보다 더 계속 나에게 떠오르는 물음에 대답해야만 했다.



"난 왜 떠나는 걸까?"



여행은 환상같았다. SNS에 올라오는 예쁜 사진들, 햇볕 비치는 테라스에서 낭만으로 가득 채운 에세이 등은 여행에 별로 관심 없는 사람도 여행에 대한 꿈과 환상을 갖게 하기 충분했다. 나는 그런 간접적인 경험들 말고 진솔한 나만의 목표가 필요했다. 왜 떠나는 지 알지 못하는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2019.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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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일. 2년 전 같은 날 늦은 밤, 이른 새벽에 졸린 눈을 부비며 ‘악당은 아니지만 지구정복’을 읽었다. 여행에 대한 꿈, 희망, 환상 같은 것들은 그때부터 생겨났다. 하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가져왔던 꿈, 희망, 환상과 앞으로 내가 가게 될 곳들은 분명 엄청나게 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고 믿기에 스물다섯살이라는 나이는 생각보다 무거운 나이이다. 이미 그걸 알고 있는 채로 졸업을 1년 앞둔 4학년이 한 학기 쉬어가며 떠나는 건 너무 늦었거나 멍청한 결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살면서 꼭 한번은 물어볼 ’유럽 다녀온 적 있어?’에 대한 대답이 그저 no에서 yes로 바뀌는 것 뿐일 수도 있다. 진솔한 나만의 목표를 찾다보니 희망찬 2년 전과는 다르게 불안감에 가득찬 채 오늘 밤을 보낸다.



2019.4.28


그래도 이미 비행기 표까지 사둔 여행, 하나하나 준비하다보니 불안감은 많이 줄었다. 내 불안감에 더해 주변 사람들의 걱정도 컸다. 생각보다 2달 이상 집을 떠나 여행하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나보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내 여행에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준비는 다 했는지, 가서는 어딜 갈 건지, 다녀와서의 계획은 또 어떻게 되는지. 그때마다 확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너무 기대된다.", "여행이 끝나면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 같다."등 허울 좋은 말로 대답했지만 사실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아마 여행에 가서도, 다녀와서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다. 그만큼 이 긴 여행에 목적이나 목표는 없었고 시간은 흘러, 어느새 떠나기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아버렸다.



2019.5.5


스무 살이 지난 나를 변화시킨 가장 큰 두 가지는 인간 관계와 군대였다. 이미 끝까지 가 볼 만큼 경험해봤고, 이제 마지막 남은 건 3주도 채 안 남은 2달간의 여행뿐이다. 짧게 짧게 여기저기 쏘다니긴 했지만 사실 이전의 여행은 여행보다는 '관광'에 그쳐서 아쉬웠기 때문에 이 여행에 거는 기대가 컸다. 앞의 두 경험에서 찾지 못했던 답을 찾기 위해 다시 나는  뫼비우스 띠처럼 처음으로 돌아가 이 문장을 써놓고 생각했다.



‘나를 찾기 위해’



모든 여행자들의 다이어리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문구다. 생각해보면 ‘나를 찾는다’의 의미가 뭔지 몰랐을 때는 어떻게 뭘 해야 할 지 몰라서 나를 찾을 수 없었다. 또 그 문장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게 된 후에는 그게 짧은 시간 안에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결국 여행에 가서도 마찬가지일텐데.. ‘나를 찾는다.’라는 목표를 세워도 난 그 목표를 이룰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떠난다.



2019.5.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공부는 하나도 안 했지만 시험을 하루 앞 둔 사람에게 평화가 찾아오듯 떠날 날이 눈 앞으로 다가오니 내 마음도 갑자기 편안해진다. 갑자기 언젠가 적어놓은 화요일의 가사처럼 불안했던 마음도 곧 사라질 것 같다.


오늘은 화요일
흘러가는 일주일은
낯선 나라에서 버스에 오르는
외국인의 외로움처럼
지나가겠지, 지금의 이 마음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연기처럼
잊혀지겠지, 지금 이 감정도
어떻게든 사라지겠지

뭐 어쨌든 좋다. 난 이 여행의 이름을 '아무 것도 찾지 않는 방랑자의 여행'으로 정했다. 악당은 아니어도 지구정복에 성공한 멋진 친구의 여행과는 분명 다른 여행이겠지만, 나는 아무 것도 찾지 않으면서도 무언가를 찾아 올 것이라 믿는다. 빛나는 것들을 찾지 못해도 빛나는 모래 사장을 걷다보면 발바닥에 모래가 묻듯, 내 발이 닿는 땅에 수많은 것들을 묻혀 올 것이라 믿는다.




[손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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