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유한 나를 지키는 방법 [여행]

프랑스 남부, '아비뇽' 근교지역 라벤더 밭에서의 여행 에세이
글 입력 2019.05.23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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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부, '아비뇽' 근교지역 라벤더 밭에서의 여행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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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다. 반대로 느낄 수도 있겠다만, 그것은 내가 착하게 사는 것이라기보단 ‘올곧게’ 사는 것에 방향성을 두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착각일 수 있겠다. 그러니까 나는 타인이 나에게 내리는 후하고 박한 평점들 혹은 친절한 경멸과 같은 피상적인 것들에 마음을 표하거나 내어주는 일을 삼가는 사람이다. 감히 ‘수더분하지 않다’라는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겠다.

나는 누군가 온당치 못한 발언과 행동을 하는 것을 볼 때 혹은 거짓된 언어와 행실을 일삼는 이들을 볼 때. 그들의 사상이 놀라워 재확인 차 한 번씩 짚고 넘어가는 사람이다. 상사 혹은 연장자에게 쉽사리 할 수 없는, 사회가 말하는 일종의 불편한 말들도 차분히 정리해서 이야기 나누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저 무던하게 넘어갈 수도 있을 법도 한데. 가치관이 뚜렷하다는 것은 때로 고집이 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을 스스로에게서 실감하는 순간이 자주 찾아오곤 한다.

사실, 내가 이러한 사람으로 변모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건드리면 바로 생채기가 나는 순두부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을 때부터.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결국 ‘모든 것들이 변한다’라는 명제뿐이라는 것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을 때까지. 생에 잡음이 가득할 때,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싶은 믿음이 간절하게 필요했던 시기를 기억한다.

사주 혹은 타로카드와 같은, 누군가는 미신이라 터부시 여길 수도 있을 만한 존재의 것들에 의지하던 시절이 있었다. 비과학적이며 합리적인 근거가 없는 그것들이 도대체 뭐라고. 무심코 자주 확인해보는 내가 굉장히 싫증이 나기도 했지만, 어느새 나의 팔자와 한 일생을 점쳐보는 것에 관해 진지하게 알아본 적이 있다. 이를 확인해보기 위한 필수 요건인 생년월일부터 태어난 시와 분 그리고 이름까지 정확하게 적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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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에 걸쳐 눈물이 많은 사람. 육십갑자 중에 가장 눈물이 많은 일주라 했다. 사막의 뜨겁고 메마른 흙이 옹달샘을 무정하게 극하고 있는 형태라 애수가 많다고 했다. 누군가는 마음이 여린 검은색 털을 가진 양이 비에 젖어 쓸쓸함이 곁들어 있는 형태라 일컫기도 했으며, 누군가는 비가 내려 젖어있는 혼탁한 땅이라 칭하기도 했다.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라는 우물 하나가 있는 형태라 언급하는 이도 있었는데, 혹시 내가 희소성을 갖춘 것일까라는 기대와는 다르게도. 내가 꽤 자주 불안하고 초조해하는 것은 언제 마를지 모르기 때문이라 했다. 오행 중에 ‘물’을 기반으로 삼는 사람이라는 말을 공통적으로 듣기도 했다. 하지만 이 물의 기운이 지나치게 강해 예술에 두각을 보이나 정신적인 아픔을 견뎌내는 일에는 상당히 취약하다는 첨가적인 말과 함께. 물이 흐르지 못하고 고이는 형태가 될수록, 겨울에 태어난 이일 수록 더욱이.

나의 우울과 불안이 수긍되는 순간들이었다.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나의 우울의 원인은 한파에 탄생한 물이 차갑게 언 우박 혹은 애매한 진눈깨비가 되어 바닥에 곤두박질치는 형태라서 그런 것일까. 곧장 결빙해버려서. 어지간하게 흐를 수 없어서. 따뜻한 봄에 태어났다면 생명을 살리는 촉촉한 물이라 칭해질 수 있었을까. 무더운 여름에 태어났다면 바다를 항해하는 물로서 지금 보다 더욱 심적인 넉넉함을 가질 수 있었을까. 감성적인 가을에 태어났다면 때로는 낭만을 선사할 수 있는 이상적인 비로 여겨질 수 있었을까. 태어난 것, 그 자체가 원망스러워진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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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세월이 흘러 문득, ‘나’라는 존재가 타인의 해석들에 의하여 좌지우지되는 것이 코웃음이 나올 만큼 우스운 일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모든 문장들은 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첫 문단에서, 가치관이 뚜렷하다는 것은 고집이 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말처럼. 어떤 이가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나’의 형태와 활자라는 것을 말이다.

심신이 지칠수록 우리는 의지하고 싶은 존재 혹은 말과 언어를 그토록 찾아 헤맨다. 하지만, ‘나’에게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은 아마 없다. 그 누구도 나와 나의 상황에 관하여 정의 내릴 수 없으며, 내두르거나 휘두를 자격이 되지 못한다. 개인은 결국 스스로만이 ‘자신’에 관하여 명백히 규정해낼 수 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내 삶의 경력과 이력에서 비롯된 감정에 관한 태도와 관념이라 말할 수 있다.

다소 놀랄 수도 있겠지만, 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은 자기혐오다. 나는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서 자극을 받는다. 자칫 심히 위험할 수도 있는 감정의 발현을 나에게 보다 현명한 쪽으로 승화하려 노력 중이다. 숨기지 않는 민낯 그대로의 솔직한 글들을 기록하고, 그림을 그리고. 돈을 벌고 이를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투자하고. 세상을 관찰하며 악착같이 살아가고 있다. 사소한 것들이라도 서술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나의 자취를 형성해가는 일이기도 하니까. 내가 가진 섬세함을 토대로 예술적인 식별력, 나만의 심미안을 단단히 갖춰나가는 일에 매진하는 중이다.

나는 적재적소에 척박한 땅을 적시는 단비가 될 것이다. 시원하고 청량하게. 타인의 애타는 목마름을 달래줄 것이다. 한 겨울에는 포근한 기운을 주는 눈이 되어 순백의 색으로 거리에 은은하게 쌓이다 천천히 녹아 강으로 흐를 것이다. 내 일생을 조용히 반복하며 종신형을 선고받은 결백한 죄수처럼.

계절은 언제나 되풀이된다.




[류승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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