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테드 창, 자유의지의 ‘날숨’ [도서]

글 입력 2019.06.09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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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우리가 해야 할 일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거대한 침묵
옴팔로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Intro


테드 창은 이번 단편집 ‘숨’으로 17년 만에 돌아왔다. 그를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은 독자로서는 꽤 빠른 귀환이었지만 이제부터는 길게 20년을 잡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까마득한 시간이 미래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놓여있다. 서울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연금술사의 문에 언젠가 인연이 닿기를 바래본다.

저번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종합선물세트의 느낌이었다면 ‘숨’은 다양한 듯 하면서도 일관된 분위기가 있었다. 이제 그것에 대해 뇌과학과 함께 말해보려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



이것은 경고이다.
주의해서 읽어주기 바란다.

예측기가 의미하는 바를
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사자는 향후 몇 주에 걸쳐
변경 불가능한 미래의 의미를 실감한다.

일부는, 자신들의 선택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선택 행위 자체를 거부한다.


알 수 없는 화자가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인간의 선택이 자유의지에 따라 내려진다는 것, 그것은 환상이라고 말이다. 이는 1980년대 벤자민 리벳의 실험 내용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그 실험은 피실험자들에게 원할 때 손가락을 까닥거리게 하고 이 때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신호 반응을 관찰했다. 놀랍게도 행동하기 전 0.3~0.5초 전에 신경반응이 나타났다. 인간의 행동은 예측 가능한 것인가? 우리의 의지는 뇌가 시키는 것에 불과한가?

자유의지에 균열을 낸 것은 우리 세계에선 손가락 실험이었지만 소설 속 어떤 세계에선 행동 1초 전 반응하는 예측기의 존재였다. 둘 모두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의지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나의 메시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무엇이 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믿느냐이며,
이 거짓말을 믿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화자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어서 말한다.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얼핏 기만이라고 느껴질 수 있는 이 말 속에는 간절한 당부가 숨어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둘 살아가기를 포기하자, 살아남기 위해서 기만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자유의지가 환상인 이상,
누가 무동무언증에 빠지고
누가 빠지지 않을지
또한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런 일을 한 것일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화자는 알고 있다.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는 사람도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누구나 그렇게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누군가는 이 말을 지팡이 삼아 일어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전혀 귀에 닿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화자가 이 메시지를 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역시도 선택할 수 없이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짧은 단편이지만 절망적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니, 그것을 전하는 자조차도 그저 있는 것처럼 믿으라는 말이 전부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이라는 말인가.

혹시 이렇게 읽었다면 허무주의의 덫에 고스란히 빠져든 것이다. 그 구덩이는 깊고 매끄러워서 쉽게 올라오기 어렵다. 테드 창은 고작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당연하지만, 아니다.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자유의지의 너머다.



자유의지의 함정


먼저 자유의지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자유의지라는 말은 언제부터 있었고 왜 중요해졌는가? 중세시대 사람들이, 조선시대 사람들이 이 말을 썼을까? 딱히 자세히 공부하지 않아도 아니라는 생각이 쉽게 들 것이다. 이것이 나타난 것은 ‘국가’와 ‘개인’이 발명된 이후다. 지금 우리가 사고할 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개념은 사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없었거나, 다른 의미였거나, 지금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자유의지는 동양이 아닌 서양사회에서 국가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주체가 필요해지자 탄생한 개념이다. 단죄하기 위해선 그가 ‘그러고 싶었다’라는 것과 ‘그’라는 단위가 필요했다.

자유의지라는 말 속에는 고정된 자아, ‘주체’가 숨어있다. 주체는 한 사람을 바라볼 때 정말 협소한 부분이다. ‘나’라는 생명체 속에 숨어있는 무수한 충동들 중에 작은 하나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모든 ‘나’를 대표시킨다. 잘 생각해보면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바다를 말할 때 바다의 무수한 속성을 댈 수 있지만 그 중 하나를 콕 집어 이것이 바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그럴 수 없다. 그런데 왜 인간에게는 그렇게 말을 하는가?

소설과 현실에서 모두 문제되었던 나의 선택 이전의 신경신호에 대해선 뇌과학의 설명을 빌리고자 한다. 뇌는 기계와 다르다. 기계는 몸체와 알고리즘이 분리된다. 뇌는 그렇지 않다. 사이언스온의 송민령 기고자의 ‘자발적인 뇌 활동’과 ‘기능적 연결’, 그리고 ‘구조적 연결’을 통해 어떻게 다른지 보자.

먼저 자발적인 뇌 활동이란 의식하는 내가 쉬고 있는 중에도 그런 ‘나’와는 별도로 외부를 주시하고 이미 일어난 일을 돌이켜보는 나를 말한다. 송민령 기고자는 “신경들의 네트워크인 뇌에서는 컴퓨터처럼 순차적인 계산이 이뤄지는 대신, 여러 활동이 동시다발로 일어난다. 이 모든 활동이 의식적으로 지각되거나, 말해지거나, 행해질 수는 없기에 경쟁에서 이긴 활동들만이 말이나 행동이나 의식적인 생각으로 드러난다.”고 말했다.

고정된 자아, 의식 위로 올라와 있는 ‘나’, 흔히 표현하기를 주체라고 말하는 내가 멍하니 있을 동안에도 끊임없이 다른 충동들, 다른 나들이 움직이고 있다. 이것들은 신체와 독립적인 마음이 아니며 그동안의 과거, 지금 신경 쓰이는 것들, 전체적인 나의 맥락 속에서 부딪친다.


[크기변환]충동표현-horz.jpg
 

이 돌아보고, 주시하고, 미리 보는 충동들은 기능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기고자의 그림을 참고하여 만들어 본 충동연결을 보면, 첫 번째는 1과 3이 서로 활성화되어 있고 두 번째는 2,3,4가 활성화되어 있다. 내 뇌의 충동들이 1,2,3,4라는 점은 동일하다고 하지만 커피를 마실 때는 1과 3이, 공부를 하다가 어떤 생각이 들었을 때 2,3,4가 순간 더 강하게 움직일 수 있다.  즉 예측기와 리벳의 실험 모두 ‘내가 곧 버튼을 누를 것이다’, ‘내가 손가락을 움직일 것이다’라는 이전 맥락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미 관련 신경이 활성화된 상태인 것이다.



자유의지의 너머


뇌의 기능적 연결이 뇌의 구조를 바꿀 수 있다. 최근의 잇따른 연구들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가장 말랑했던 시기에 비하면 느리긴 하지만 분명히 바뀐다고 한다. 이를 신경가소성의 원리라고 하는데, 간단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사용하면 강해지고, 그렇지 않으면 약해지다 끊긴다. 내가 선택한 기능적 연결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면 곧 그것이 미래의 달라진 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을 활용한 치료법과 훈련법은 이미 알려져 있다. 만성 통증 환자들의 관련 신경 영역의 활동이 줄면서 통증도 줄어들기도 하고 운동선수들이 머릿속 시뮬레이션을 하며 실제 운동과 비슷한 효과를 내기도 한다.

현대사회의 신화인 ‘노력하면 다 돼’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노력은 상황에 대한 변수이지 절대적인 요인이 아니다. 타고난 유전자나 주위의 환경은 사람마다 다르다. 다만 그 우연의 조건들과 필연적인 지금의 내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우리가 경험했던, 경험하고 있는, 경험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과 지금 느껴지는 감정들, 들려오는 생각들, 바깥의 날씨 등의 환경들이라는 요소는 필연적이라도 그 사이에서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어떤 것을 연결하여 어떻게 조합할지, 어떤 내가 될지 만들어갈 수 있다. 이런 장에서 ‘나’는 고정되지 않았으며 결정되지도 않았다.

“자유의지가 없다”라는 말 너머에는 역설적으로 더 큰 자유가 있다. 주체라는 작은 충동에 구속되지 않은 더 많은 나의 가능성과 더 넓은 세계와의 만남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나’를 선택할 수 있다. 우리에게 경고했던 화자와 그 뒤의 테드 창은 다른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건네며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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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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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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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셜스튜핏
    • 다만 그 우연의 조건들과 필연적인 지금의 내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좋은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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