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죄와 벌'에 나타난 이성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고찰 [도서]

글 입력 2019.06.11 17:52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죄와 벌'이 수행해낸 어려운 과제: 종교적 구원의 메시지 복원


신에 대한 믿음이 예술, 정치, 경제를 비롯한 인간 생활의 전반을 사로잡았던 중세 시대를 지나, 14세기 이후에는 종교가 아닌 인간이 다시 삶의 중심에 서는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했다. 그 후 17세기, 18세기에 걸친 계몽주의 사조와 급격한 자연과학의 발전, 산업화의 추동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이 종교적 신념보다 우위에 서도록 만들었다. 자연의 파괴력과 거대함 앞에 무릎 꿇었던 과거는 티끌이 되어 날아갔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이성만으로 대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 시대가 바야흐로 찾아온 것 같았고, 온 지구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으로 부풀어올랐다. 이렇게 낙천적인 현재만 지속된다면, 더 이상 신에 기대 아파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이후 보급된 사회주의 사상은 종교의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들었다. 칼 마르크스는 ‘종교는 고난 받는 피조물의 한숨이고, 무정한 세계의 영혼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밝히기까지 했다. 그는 종교가 내세를 앞세우며 사람들을 현세의 문제들로부터 유리시키고, 결과적으로 지배층의 착취와 억압을 영속시키는 도구로 악용된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자들에게 종교란 합리적 문제 해결을 방해하는 미신에 불과했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에 대한 당대의 강력한 믿음은 그것이 불러온 파괴적 부작용에 의해 서서히 깨지고 있었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할 이성은 어느새 ‘인간’의 본질적 권리와 가치 위에서 군림하려 들기 시작했다. 사람보다 과학이, 사람보다 이데올로기가, 사람보다 자본이, 사람보다 권력이 중시되는 모순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온 세계에 넘치는 풍요를 선물해줄 것 같았던 산업화는 극심한 빈부격차를 낳았고, 아무도 굶어 죽지 않는 세상을 꿈꾸었던 사회주의는 권위주의적인 정부의 무능함을 증명해냈을 뿐이었다.


19.jpg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이라는 작품을 통해 19세기 세계 전반을 강타한 이성만능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동시에 러시아 내에서 설 자리를 잃고 있던 종교적 구원의 메시지를 복구시키는 어려운 작업을 수행하고자 했다. 이 작품에는 종교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했고, 신의 영역인 생명까지도 인간이 관장할 수 있다고 믿었던 라스콜니코프가 소냐의 사랑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이 기나긴 서사 속에서 묘사되고 있다. 소냐의 헌신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사랑은 결코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지만, 그녀의 비합리성은 ‘이성의 광기’ 속에서 방황하던 라스콜니코프를 다시 삶 속으로 끌어들이는 아름다운 구원이 된다.

이번 글에서는 ‘죄와 벌’ 속에 담긴 이성과 종교 간의 대립적인 구도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또한, 소설 속에 나타난 인간과 사랑에 대한 종교학적, 철학적 함의 역시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이성의 시대’ 였던 19세기에 과감히 ‘영성을 통한 구원’을 외쳤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 요소가 될 것이다.



이성의 끝에 선 라스콜니코프, 종교의 끝에 선 소냐


‘죄와 벌’ 속에는 극한의 가난으로 인해 인간의 기본 품위조차 유지할 수 없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마르멜라도프의 가족들이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마르멜라도프가 얻는 직업마다 번번이 실직하면서 가산을 탕진하는 동안, 소냐는 가난을 면하기 위해 몸을 파는 수치스러운 일까지 감행하게 된다. 본래 명망 있는 집안의 딸이었던 마르멜라도프의 아내 카체리나는, 남편마저 말에 깔려 죽고 나자 선하고 명랑했던 심성을 잃은 채 점차 통제 불가능한 광인으로 변해가고 만다.

그녀는 결국 폐병에 걸린 채 길거리에서 광대 노릇을 하며 돈을 구걸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이성적인 세계관을 유지하려 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현실을 눈앞에 두고 종교를 믿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만일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어떻게 그들의 고통과 가난과 굶주림과 울부짖음을 이토록 수수방관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에게 최소한의 자비도 허용하지 않는 하느님을 믿고, 그로부터 ‘성스러운 가르침’을 기대하는 것은 이성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다분히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많은 사람들은 고통스러울수록 더 종교에 기대고, 신에게 의존한다. 그들은 지금의 아픔이 ‘자신을 더 좋은 길로 인도하기 위한 그 분의 섭리’라고 위안하며, 모든 것을 미리 가르쳐주기보다는 시행 착오를 통해 스스로 깨닫도록 이끄는 신의 지혜에 감탄한다. 힘들면 힘들수록 그들의 기도와 믿음은 더 굳건해질 뿐이다.


죄와벌.jpg
 

이러한 종교의 역설에서 소냐와 라스콜니코프는 반대편의 양쪽 끝에 서 있는 인물들이다. 라스콜니코프는 이성주의자로서, 소냐에게 ‘하느님이 여태까지 너에게 무엇을 해 주었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소냐는 ‘모든 것을 주셨다’고 대답한다. 그녀는 자신의 가난을 결코 신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며, 몸을 팔았다는 이유만으로 신이 자신을 벌할 것이라고도 믿지 않는다. 또한, 하느님을 비난하는 라스콜니코프가 언젠가는 영성에 눈뜨고 그로 인해 새롭게 태어나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반면, 라스콜니코프는 신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가난과 타인의 가난, 그리고 사회적 부정의를 목격하면서 ‘모든 것을 관장하는 신’의 능력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되는 인물이다. 그는 신에게만 속하는 인간의 생명 영역까지도, 완벽한 이성을 가진 ‘비범한 인물’이라면 침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 인간은 두 부류로 나뉜다. 보수적이고 순종적인 첫번째 부류의 평범한 사람들과, 새로운 것을 생산해내기 위해 때로는 법을 뛰어넘을 ‘권리’를 부여받는 두번째 부류의 비범한 사람들이다. 나폴레옹이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일부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죽였듯이, 특출난 인물이라면 거대한 선을 위한 약간의 범죄는 양심의 가책 없이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네 생각은 어때, 하나의 하찮은 범죄가 수천 개의 선한 일로 무마될 수는 없을까? 하나의 생명을 희생시켜 수천 개의 생명을 부패와 해체에서 구하는 거지. 하나의 죽음과 백 개의 생명을 서로 맞바꾸는 건데, 사실 이거야말로 대수학이지 뭐야! 게다가 저울 전체를 놓고 보면 이런 폐병쟁이에 멍청하고 못된 노파의 목숨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노파는 해로운 존재니까 바퀴벌레의 목숨, 아니 그만도 못한 목숨이야. 남의 목숨을 좀먹고 있거든.

- 123쪽


라스콜리코프는 이러한 공리주의적 논리에 따라,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살해한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그 장면을 목격하고 만 그녀의 동생 리자베타까지도 살해하고 만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비범한 인물’이 아니라, 범죄를 저지른 뒤 혹시라도 들킬까 전전긍긍하는 ‘평범한 부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이 알료나와 리자베타를 살해하는 ‘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법을 뛰어넘을 수 있을만한 비범성을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죄책감에 시달린다. 즉, 그의 죄책감은 본질적이고 1차적인 것이 아니라 표면적이고 2차적인 것이다.

라스콜리코프는 소냐에게, 루쥔과 카체리나 중 한 명이 반드시 죽어야 한다면 루쥔을 죽이지 않았겠냐고 질문한다. 그러자 소냐는 말한다.


내가 하느님의 섭리를 알 수는 없잖아요..... 게다가 어째서 물어서는 안 될 것을 묻는 거에요? 뭐 하러 그런 헛된 질문을 던지나요? 그것이 나의 결정에 달려 있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죠?


- 244쪽



 이 두 사람의 차이는 소냐의 답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라스콜리코프는 신이 사회적 정의를 실현해내지 않는다면, 전지전능한 소수의 인간이 신의 대역을  맡아 ‘초법적 권한’을 통해 그것을 쟁취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소냐는 죄와 정의는 신에게 속하는 것이며 제 아무리 뛰어난 인간의 이성일지라도 신의 섭리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녀와 어머니를 통한 구원의 이미지


소설 ‘죄와 벌’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조건적이고 세속적인 사랑과, 무조건적이고 종교적인 사랑을 모두 제시하여 대비시키고 있다. 전자는 표트르 페트로비치 루쥔과 두냐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 루쥔은 자신에게 고분고분한 태도로 순종하고, 어떠한 명령에도 반발 없이 복종할 여자를 필요로 했다. 그에게 사랑은 ‘지하생활자의 수기’ 속 지하인과 마찬가지로 ‘우위를 점하는 것’에 불과했고, 두냐를 선택한 것 역시 그녀가 이러한 요구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사랑의 근본 속성인 우연성, 아름다움, 존경 등을 모두 결여하고 있기에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지의 여부도 불투명하다.

이 작품 속에서는 다소 극단적으로 제시되었지만, 실제로도 우리네 삶 속 거의 모든 사랑은 세속의 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사람들은 배우자로부터 어머니에게 받았던 것과 같은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기대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결혼이란 현실적 조건과 자신의 기대를 타협해나가는 고단한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종교 속 사랑에 기댄다. 인간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던 예수, 그런 예수 옆에서 끝까지 고통을 함께 나눴던 성모 마리아를 통해 현실에서 찾기 힘든 모성의 사랑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려 하는 것이다.


god.jpeg
 

‘죄와 벌’에는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재현해낸 것 같은 종교적 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 첫째로, 소냐와 두냐는 예수의 속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인물들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 누구보다 성스럽고 귀한 존재지만, 동시에 십자가에 못 박힐 정도로 많은 고통과 초라함을 견뎌내는 존재이기도 하다. 소냐와 두냐 역시 비참한 환경적 요인 때문에 창녀, 혹은 잠재적인 창녀의 이미지에 노출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순결함을 잃지 않는다. 라스콜니코프의 말에 따르면, 비록 가족을 위해 창녀가 되었지만 ‘이 모든 치욕은 소냐를 기계적으로만 건드렸을 뿐 진짜 음탕은 아직 그녀 속으로 한 방울도 스며들지 않았’다. 두냐 역시 스미드리가일로프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취직한 뒤 그의 노골적인 추파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루쥔에게 원치 않는 시집을 갈 것을 고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해서 그의 영성이 사라지지 않았듯이, 이러한 사실들이 두냐의 순수성을 조금이라도 위축시키는 것은 아니다.

‘죄와 벌’의 종교성을 더 강화시키는 흥미로운 사실은 리자베타가 소냐와 정신적으로 연관되는 인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리자베타는 비록 나이 상으로 소녀가 아니지만, 소설 속에는 그녀를 ‘어린이’로 비유하는 묘사가 반복되어 나타난다. 또한, 소냐가 라스콜니코프에게 ‘라자로의 부활’ 이야기를 읽어주는 신약 성서가 리자베타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소냐와 리자베타가 각각 자신의 성상과 청동 십자가를 교환한 적이 있다는 사실은 그들 사이에 모종의 종교적 유대가 있음을 암시한다. 즉, 라스콜니코프가 리자베타를 죽인 죄로 광기의 벌에 시달리다가 소냐의 사랑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이 이야기의 구조는, 결과론적으로 예수를 못박은 뒤 다시 그의 사랑 안에서 안식을 찾는 인간의 모습과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소냐는 라스콜니코프에게 자신의 십자가를 걸어주면서 ‘함께 고통을 짊어지자’고 말하면서, 그의 불행에 진심으로 공명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소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 유형을 가서까지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는다. 그가 느끼는 죄책감은 오로지 ‘비범한 인물이 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책’일 뿐이다. 그러나 소설의 맨 마지막에 그가 소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의 손을 꼭 붙들며 노을을 바라보는 장면은 사랑이 갖는 모든 심미적 아름다움의 결정체를 보여준다. 비로소 소냐의 사랑이 그를 구원해낸 것이다.


병색이 완연한 이 창백한 얼굴에서 이미 새로워진 미래의 아침놀이, 새로운 삶을 향한 완전한 부활의 아침놀이 빛나고 있었다. 사랑이 그들을 부활시켰고, 한 사람의 마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무한한 생명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 496쪽


이 소설에는 예수뿐 아니라 성모 마리아를 연상시키는 인물들도 등장한다. 라스콜니코프의 어머니인 알렉산드로브나, 스비드리가일로프의 부인이었던 마르파 페트로브나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아낌 없이 베푸는 모성의 이미지를 상징한다. 예수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성모마리아처럼, 알렉산드로브나 역시 속수무책으로 아들이 파멸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페트로브나는 채무로 인해 감옥에 갇혀 있던 스비드리가일로프를 꺼내주는 등 그에게 재정적, 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모성의 사랑을 베푼다.

하지만,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성모 마리아로 대표되는 모성의 상징인 페트로브나를 독살하고 만다. 이는 라스콜니코프가 소녀이자 예수의 상징이었던 리자베타를 살해한 것과 겹치는 부분이다. 소냐와 리자베타처럼, 라스콜니코프와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서로와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끊임 없이 소녀들을 탐하고, 죽기 직전에는 기껏해야 다섯살이 된 아이로부터 성적 충동을 느끼는 꿈을 꾸는 것은 곧 사랑을 통한 구원을 탐닉하는 그들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두냐의 사랑을 얻는 데 실패한 뒤 자살을 선택하는 반면, 라스콜니코프는 소냐의 사랑을 통해 종교적 부활에 성공함으로써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너'와 함께하는 사랑이 나와 세상을 구원하리라


love.jpg
 

‘죄와 벌’ 속 라스콜니코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다른 작품인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지하인과 비슷한 점이 많은 인물이다. 이성적이고 관념적인 사고에 갇혀 산다는 점에서도, 다른 사람들과의 유대를 맺고 유지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에게는 그를 사랑해주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고, 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는 소냐도 있고, 그의 옆에서 든든하게 힘이 되어 주는 친구 라주미힌도 있다. 그렇기에 그는 지하인처럼 20년 넘게 골방에 갇혀 수기만 쓰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 삶으로 돌아와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인간’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죄와 벌’을 읽는 독자들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작품을 통해 지하인을 지하의 삶으로부터 구원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지만, 결국 라스콜니코프를 지하에서부터 구원해낸 것은 신이었다. 그 신은 ‘나’의 형태가 아닌 ‘너’의 형태를 통해 그에게 왔고, 때로는 ‘나’와 ‘너’ 사이에 있는 사랑의 형태를 통해 그의 가슴을 덥혔다. 종종 사람들은 신이 ‘나’를 통해 세상에 구현된다는 착각을 하곤 한다. 그들은 스스로가 전지전능하다고, 다른 사람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한 판단력을 갖고 있다고, 자신이야말로 세상의 정의를 회복시킬 메시아라고 믿는다. 라스콜니코프도 그러한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를 구원해낸 예수는 가장 낮고 천해 보였던 창녀의 형태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성스럽고 고결하게 그에게로 왔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결국 ‘나 혼자만의 이성이 아닌, 너와 함께하는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정도로 요약될 수 있지 않을까.




[이창희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ne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아트인사이트 (ART insight)
E-Mail : artinsight@naver.com    |    등록번호 : 경기 자 60044
Copyright ⓒ 2013-2019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